1946년 12월 7일 백인제 박사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높은 뜻으로 그동안 병원 운영을 통해 마련한 전 재산을 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 이사는 백인제, 김희규, 백붕제, 박병래, 기용숙 박사가 선임되었으며, 감사는 공병우, 백기호 박사가 선임되었다. 정관에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 아래 인술(仁術)로써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 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철강으로 재벌이 된 카네기가 미국 최초로 부를 사회에 환원, 카네기재단을 설립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국민의 교육, 문화, 복지(카네기재단, 카네기멜론대학 설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후에 록펠러, 포드 등 여러 재벌이 이를 본받음으로써 미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꽃을 피워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익 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도 미국의 카네기재단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여러 변수가 잠복해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백인제병원을 재단법인으로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과 의술계의 권위 백린제 박사가 경영하는 서울 저동2가 백병원은 이번에 1천3백56만 원 재단법인으로 개조하는 동시에 의학 연구 기관 설치, 의학 연구 장학금 제도 설정 등 여러 가지 사업으로 재출발을 하기로 되었다 한다.
1950년 7월 19일 6·25전쟁 중에 백인제 박사가 납북되면서 백병원은 존립이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설립자의 높은 뜻을 그냥 무산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설립자의 직계 제자인 김희규 박사를 위시하여 윤덕선(한림대학 설립자), 전현오, 신현구, 그리고 가장 나이 어렸던 백낙환(전 이사장)이 가담하여 백병원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은 1955년 11월 28일 경향신문 '피랍 인사의 가정을 찾아서 의사 백인제 씨'의 기사이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피랍 인사의 가정을 찾아서 의사 백인제 씨
"피랍 인사에 대한 일을 사회에서 모두 잊으신 것만 같고 쓸쓸하고 외롭더니 이처럼 수고를 하여 주시어 한결 마음에 위로도 될뿐더러 희망도 생깁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최경진 여사는 어딘지 모르게 교양과 기품이 풍기었다. 지긋지긋한 쓰라린 얘기를 새삼 끄집어 내기는 가슴이 북받치고 괴롭고 무섭기까지 한 일이었으며 다시금 입에 담기 싫은 말이었으나 안경 너머로 고요히 서리는 눈물을 감추며 "매일 이렇게 처량한 얘기만 듣고 다니시기에 더 피곤하실겝니다."고 착잡히 얽히는 슬픈 감정을 넌지시 누르고서 그보다도 인사의 도리를 다하는 여사의 속 깊은 심금이 더욱 기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오히려 여사는 예의상 하는 수 없이 쓰라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끔직스러운 육이오가 일어나고 괴뢰군이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백인제 병원을 놈들이 포위했으며 가족은 그대로 집 속에 감금되고 백박사만은 피신을 하였다고 한다. 병원과 집이 몰수를 당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가회동 집으로 옮겼으며 박사가 피신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던 어느 날 새벽같이 박사는 두 청년에 끌리어 가족이 있는 가회동 집으로 왔더라는 것이다. "늙은 아버님을 한 번만 뵙고 가겠다고 하니 놈들이 끌고 온 것이었어요. 마침 시동생(백붕제)도 집에 숨어 있었는데 놈들에게 들켜서 한날한시에 두 형제가 끌려가고 말았지요. 그것이 7월 19일 새벽입니다. 그러고선 지금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풍문에 이러니저러니해도 그것은 믿을 수가 없고 다만 언제든 꼭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외국에 볼일 보러가셨다가 그곳에 계실 기한이 차서 오실 때가 되면 오시던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책상 위에 88점을 받은 산수의 시험 답안지가 놓여 있었다. 막내딸 금주 양(덕수국민교 2년 8세)의 것이었다.
장녀 향주 양(24세)은 미국 보스톤에 있는 윌슬리대학(식물학과 4년)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장남 낙조 군(20세)은 일본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국제기독대학의과(3년)에서 수학하고 있다고 한다. 여사는 두 자녀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차녀 남주 양(경기여고 2년 17세), 2녀 향남 양(경기여중 1년 14세), 차남 낙훤(덕수초등학교 4년 11세), 그리고 4녀 금주 양을 거느리고 한편 광대한 병원을 보살펴 나가기에 여사는 늘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인 백인제 박사가 납북된 후 동란 중 공산당의 손에 여지없이 폐허가 되어 버린 병원을 여사는 삼 년 동안이나 걸리어 복구시키는 데 애로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모든 일에 철저하던 백 박사이기에 시설도 기구도 충실한 것이었으므로 그만큼 복구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박사는 제자를 잘 길러 놓았기 때문에 박사가 없는 지금에도 전에 부원장이던 김희규 박사가 현 원장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 병원 경영에나 환자의 치료나 수술에도 조금도 불안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는 사변 때 전부 없어지고 가구라곤 하나도 없었다. 가구보다도 여사는 병원의 침대 하나를 더 마련했다. "앞으로 기계를 조금만 더 사들이면 되겠습니다. 정말 무에서 유를 낳은 것입니다. 괴뢰군 놈들이 기계를 전부 가져가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렇게 병원을 복구시켜 놓은 여사는 남편의 뜻을 받든 것이며 기다림의 태세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생활은 병원으로 유지됩니다. 외국에 가 있는 애들은 공부도 잘하는 것 같으며 학교의 원조도 받는 모양입니다." 여사는 온갖 쓰라림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남편이 없이도 있을 때와 다름없이 복구하였기에 "그이가 수술을 하고 진찰실에서 문득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느낌이 아니요 정녕 그런 날이 생생히 실현되기를 복구된 병원을 보면서 어찌 여사만이 간절히 바라고 느낀다 할 수 있으랴.
1960년대 당시 외과 전문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백병원은 하루 평균 4~5건, 많을 때는 10여 건 이상의 개복 수술 환자가 있어서 언제나 혈액 수급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이러한 혈액 수급의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윤덕선 박사를 미8군 121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 은행 실무 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백병원 1층에 있던 검사실에 붙여서 혈액 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병원 혈액원이다. 당초 백병원 혈액은행의 설치의 목적이 자체에서 소요되는 혈액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나 다른 병원에게도 다소의 혈액을 공급 해 주기도 했다.
백병원의 혈액원은 국립혈액원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사립 병원의 혈액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정부에 의해서 1954년 6월 7일에 국립혈액원이 개설되기 앞서 1954년 초 민간 병원으로는 백병원에서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이다. 대개의 병원들이 국립혈액원, 그 후에는 적십자혈액원에서 필요한 혈액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 데 비해, 외과 전문의를 훈련시켜 혈액 은행을 개설하고 자체에서 직접 혈액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해결 방법을 택한 백병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다른 사립 병원 혈액원의 표본이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백병원은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국면에 늘 등장하였다. 해방 이후 김구, 장택상, 장덕수, 장면 등에 대한 암살 및 피습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몇몇 대학 병원도 있었지만 외과라면 백병원을 떠올릴 정도여서 백병원은 해방 이후의 정치 사건에 많이 등장하였다. 1960년 4·19혁명은 그러한 중요 정치적 사건 중에서는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백병원은 당시 외과 영역에서는 전통과 시설, 실력 등 최고의 병원이었다. 사진은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자에 소개된 [인술 탐방 전문 병원 순례 (1) 백병원편]의 기사 내용이다.
인술(仁術) 탐방 전문 병원 순례 (1) 백병원편(白病院篇) 외과(外科)선 전통(傳統), 권위 과시 시설 등 일본보다 앞서
"현대 의학은 곧 외과 의학"이라고 말하리만큼 외과 영역은 오늘날 치료 영역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겨우 후진국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된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정에서도 외과(外科) 의학만은 세계 수준을 육박하고 있으며 소형 수술로부터 대형 수술에 이르기까지 외과 의학은 급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도약 단계의 상황 속에서 백병원은 외과 의학의 [보스]와 같은 존재로서 30년의 전통과 함께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외과 전문 병원이다.
1939년 일제 시 백인제 박사가 이룩해 놓은 외과 전문 병원이며 미국의 [메이요클리닉]이 이상형으로 경영해 오다 45년 6.25전쟁으로 납북됨으로써 현 가톨릭의대 김희규 박사가 대를 이어 제2대 원장으로 취임, 재단 법인으로 비영리 의료 기관이 됐다. 1962년에는 백인제 박사의 조카 백낙환 박사가 제3대 원장으로 취임, 백병원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소형 수술로부터 대형 수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과 수술 환자들이 모두 이 병원을 거쳐 가리만큼 수많은 수술 환자를 취급한 이 병원은 수술 전문 병원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특히, 위장 수술을 주축으로 수술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종합 병원과 똑같은 규모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외과 전문 병원으로 손꼽고 있다.
서민층을 대상으로 환자를 취급하고 있는 이 병원은 비영리 의료 기관으로서 환자의 능력에 따라 수술비를 받는 [인술] 그대로의 병원이다. [워싱턴], [보스턴], 구라파, 일본 등 선진국의 외과 대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백낙환 원장은 "병원은 곧 인술이요 환자를 치유하는 데 최대의 목적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현대 의학은 곧 외과 의학"이라고 말하고 종래의 외과 영역과 달리 오늘날의 외과 영역은 모든 영역의 주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6.25전쟁으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의 최신 외과 의학이 우리나라에 직수입되어 국제 수준을 육박하며 일본의 외과 의학을 앞지르고 있다고 자랑했다. 1천여 평의 대지를 갖고 있는 이 병원은 종합 병원 못지 않게 심장 외과의 특수 시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갖추고 있으며 곧 외국 의료 차관을 도입, 최신 [매머드]병원을 건설할 계획이다.
백원장 밑에 10여 명의 의사가 있으며 연중 무휴로 수술 환자의 수술에 여념이 없는 비영리 의료 기관이다. 백원장은 현재 가톨릭의대 외과 교수이며 서울의대 외래 교수이기도 하다. 당년 44세.
백인제 박사의 조카로 1950년대 초부터 백병원에 헌신해 온 백낙환 박사(전 이사장)는 1963년 5월 3일 제3대 원장에 취임한 이래, 원장, 외과과장, 가톨릭의대 및 서울의대 의과대학 교수, 당직의사, 원무과장 등 1인 3~4역을 담당하면서 백병원 중흥을 도모했다.
백병원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백인제 박사의 제자들에 의해 외과 병원으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백낙환 박사는 특히 복부 외과, 식도 외과에 힘을 쏟았다. 식도 수술은 이미 6·25전쟁 전에 김희규 교수 지도하에 백병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였으며, 백낙환 박사는 1963년 국내 최초로 소아에서의 선청성 거대결장(巨大結腸)에 대한 스완슨 수술법(Swanson's operation)을 시행하였다.
장중첩증의 경우도 1964년 7월 우리나라에서 최다인 350 사례를 백병원에서 발표하는 등 의사로서 명성도 쌓아 갔다. 1968년 백병원 백낙환 원장은 한국인 최초로 골반내장(骨盤內臟) 전적출술(全摘出術)을 성공했다.
아래는 1968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골반내장(骨盤內臟) 전적출술(全摘出術) 성공 백병원장 한국인으로선 처음
백병원 원장 백낙환 박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골반내장 전적출술에 성공하여 직장암을 앓던 유근원 씨(남. 57세), 방광암에 걸린 김홍완 씨(남, 63세)를 치료했다. 이 수술은 골반 안에 든 직장자궁(直腸子宮) 방광 중의 하나에 암이 생겼을 때 다른 곳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 기관을 모두 적출하고 소장으로 인공 방광, 대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어 주는 수술로 암 치료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1968년 직장암 수술을 받았던 유근원 씨는 1972년 10월, 백낙환 원장 앞으로 "생사의 절망 속에서 백병원 원장님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여 회갑을 맞이했다"는 안부 인사와 함께 감사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백인제 박사는 병원 경영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의료 혜택을 넓히고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백인제 박사는 1936년 11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의학 연구차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던 중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하고, 미국의 의학이 유럽에 비해 실험과 연구에서 뒤떨어진 반면, 임상 기술은 더 발달한 것을 발견했다. 메이요클리닉은 시골 마을에 있던 사립 병원으로 1889년에 개원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 명문 병원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다른 병원과는 달리 일찍부터 외래 진료를 중심으로 하고 특별한 때만 입원을 시키는, 당시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진료 방법을 취하였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 구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연구 환경 조성, 환자의 재정적 여건을 고려한 의료 수가 책정 등 식민지 의료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백인제 박사는 미국 연수 중 메이요클리닉을 방문하고 이와 같은 공익 재단을 한국에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1946년 백병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으로 만들었다.
백인제 박사가 다녀간 지 30년 후에 백낙환 이사장도 이곳을 방문하고 백인제 박사의 큰 뜻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백인제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구미 의학계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메이요클리닉과 같은 훌륭한 의료 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백낙환 원장은 1960년대 초부터 구상하던 병원 현대화를 구체화하기 위한 4부분으로 된 재건 계획서를 1967년에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백병원의 상황과 무료 진료, 교육, 연구, 간호학교 설립 계획 등 백병원 발전을 위한 기초적인 구상이 포함되어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내원 환자가 줄어들고 건물이 낡아 여기저기 비가 새고, 진찰실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는 지경이었다. 재건 계획서를 작성해 당시 상황을 철저히 점검하고 드디어 1970년 4월 1일 백병원 현대화 공사를 시작하였다. 백병원 재건 계획서는 150병상 2000평 규모의 현대식 종합 병원을 목표로 공사비 16억 원, 시설비 6억 원 등 약 22억 원이 소요되리라 예상했다.
백병원 현대화 공사는 1971년 초부터 공사비 조달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된 공사비를 초과했고, 담보 감정액이 낮게 책정되는가 하면 공사비에 충당하고자 했던 토지 매각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시공 업체가 수차례 바뀌었는가 하면 심지어 1971년 4월 영락교회는 백병원을 인수하기 위한 백병원인수위원회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백낙환 원장은 이러한 좌절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1972년 3월 부분 준공할 수 있었다.
백인제 박사의 장남인 백낙조 전 이사장이 서독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중 백병원 중흥을 위해 1970년 7월 귀국하여 백병원 재건에 힘썼다.
백병원은 1972년 3월 7층까지 부분 준공해 가사용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개원식을 앞두고 건축비를 받지 못한 건축업자가 열쇠를 주지 않아 부랴부랴 개원식을 연기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건축비는 개원 후 천천히 갚는다는 조건으로 16개과 140병상의 현대식 종합 병원을 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