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이자 살레시오회 수도사제였던 이태석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그래서 그의 선교지였던 아프리카 남수단의 오지 톤즈(Tonj) 마을 사람들은 이태석의 세례명에 성을 덧붙여 그를 ‘쫄리(John Lee)’라고 불렀다. 20년 넘게 이어진 오랜 내전으로 지치고 상처받은 톤즈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쫄리 신부는 자상한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태석은 1962년
송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광역시 남부민동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4남 6녀 가운데 아홉째로 태어났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놀이터와도 같았던 집 근처의 송도성당을 다니면서 일찍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활발하고 감수성 있는 아이로 성장해 갔다. 그에게 성장 과정의 가난은 오히려 다른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삶을 살고자 하는 종교적 자각의 배경이 되었다. 나아가 훗날 톤즈의 가난한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이태석은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한 뒤 군의관 복무를 마쳤다. 그러나 이후 그는 안정된 의사의 삶을 포기하고 가톨릭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만류를 눈물로 설득한 이태석은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고, 이듬해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1997년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대학교 신학부로 유학을 떠난 이태석은 자신의 선교지를 찾던 중 1999년 여름방학 기간에 당시 전쟁 중이었던 남수단의 톤즈를 최초로 방문하였다. 톤즈의 열악하고 비참한 모습에 크게 놀란 이태석은 이곳에서 선교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2001년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 이태석은 같은 해 12월 처음 결심대로 톤즈로 다시 갔다. 그리고 이후 7년 동안 톤즈에서 차분히 의료와 선교,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해나갔다.
이태석은 톤즈에서 반경 100 km 내의 유일한 의사였다.
하루에 200명, 많게는 300명이나 되는 환자들이 그의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말라리아,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한센병 같은 감염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부족간 전쟁으로 총상이나 자상을 입은 환자들도 이태석의 손을 거쳐 갔다. 이태석은 급한 대로 "마른 풀과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움막 같은 집"을 최초의 진료소로 삼았다. 이 초라한 진료소는 2004년 그가 직접 벽돌을 구워 가며 지은 12개의 병실이 있는 시멘트 건물로 발전하였다.
이태석은 살레시오회를 창설한 돈 보스코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은 이곳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의 교육에도 많은 열정을 쏟았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을 위해 전쟁 중 폭격으로 폐허가 된 학교 건물을 보수하여 초·중·고등학교 11년 과정을 차근차근 꾸려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이태석은 학생들에게 손수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쥐여 주고 음악을 통해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해 주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음악반은 훗날 35명으로 구성된 브라스밴드부로 성장하였다.
공식 후원회인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가 결성되고,
톤즈의 의료선교와 학생교육도 본궤도에 올라 한창이던 2008년 11월, 이태석은 건강검진에서 예기치 않은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내에서 투병 생활을 해야만 했다. 투병 중에도 이태석은 늘 톤즈와 아이들을 잊지 않고 걱정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이태석은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 35분 선종하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
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 이태석은 48세의 생을 마감하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향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면서 우리에게 사랑과 나눔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