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access_time 2024.12.10 15:43visibility 95
저도 정년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닿지 않아요. 그런데 총장님께서 주신 패를 보니 ‘귀하께서는 33년 6개월 동안’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더라고요. ‘아, 그새 이렇게 세월이 지났구나’. 요새 교육공무원이 65세에 정년을 하니깐 33년 6개월을 이 학교에 있었다 하면 이 학교에 있었던 세월이 있지 않았던 세월보다 더 길더라고요. 참 감사하죠. 제가 인생을 살면서 세 분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 故 백낙환 이사장님, 저희 집에 돌아가신 어르신, 제가 사사 받은 지도교수님입니다. 세 분 모두 애석하게도 생존해계시지는 않지만, 백낙환 이사장님, 어르신, 지도교수님 세 분 보면서 닮아가려고 노력했던 점이 오늘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 연구해 오신 분야나 성과 등을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학과 자체가 pure basic이라기보다는 사회의학적인 배치이기 때문에 연구라고 내세울 만한 큰 업적은 크게 없지만, 사회활동을 하면서 그 부분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부산-경남 지역은 과거에는 우리 분야에서도 역학, 보건관리, 환경의학 크게 대별이 되었는데, 지방에서는 (보건)관리로는 선대 교수님들이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러니까 밥그릇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직업환경의학과의 전신인 산업의학을 대부분 했거든요. 수학은 산업의학을 중심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학교로 적을 옮겨 오면서 그게 좀 싫다고 느껴졌었어요. 그래서 역학을 소위 말해서 찍고, 지금까지 역학을 해오고 있는데 당시만 해도 부산 지역에서 역학을 한다고 표방을 하면 중앙에 계시는 교수님들이 ‘부산에 역학이 있냐’, ‘역학을 누구한테 배웠느냐’, ‘제대로 공부를 했냐’ 이런 혹독한 평가가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닿아서 공공을 중심으로 소위 말하는 역학이라는 틀 안에서 펼치다 보니깐 이제는 어디 가서 제가 역학을 한다고 하면 예방의학 측에서도 아무도 토를 단다거나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이 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더 일을 할 수 있게 된 플랜트도 역학이기 때문에 저는 역학 쪽에서 많이 발품과 족적과 약간의 연구 이런 것들을 쌓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흐뭇하다’ ‘기쁘다’ 말씀드립니다.
보통 관운이 운이 닿아야 하는데 저는 학교 안에서 참 운이 없어요. 바깥에서는 지방에서 사실은 큰 학회의 이사장이나 회장을 한다는 것은 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에요. 어쩌다가 연공서열 방식으로 보통 운영을 합니다. 제 바로 앞에 있는 선생님이 문제가 있어서 안 되시고, 우리 학회는 옛날부터 지방에서 한 번 하면 서울에서 한 번 하고 이러한 지그재그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그때 굉장히 유니크한 선배님이 제 바로 위에 계셨어요. 이제 지방-서울-지방-서울 하다보니 순번이 저한테 왔죠. 그래서 학회장을 제가 하게 되었고, 일복은 참 많아서 보통 선배님들은 학회만 하면 그냥 지나갔는데, 저는 70주년을 맞이하게 되어서 정말 곤욕을 치뤘습니다. 가뜩이나 도와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사람 인프라도 굉장히 작은데, 그 거한 일을 하라고 하니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근데 많은 분의 도움을 통해서 해운대에서 위세를 떨치면서 예방의학회 70주년을 잘 마치고, 그 덕에 저도 굉장히 많이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앞에 역학회장을 하면서 잔뼈가 굵었던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2014년에 역학회장을 하고 2016년에 예방의학회 이사장을 했으니깐 그 앞에 약간 선 경험, 상대적으로 작은 학회의 회장을 했던 경험이 큰 행사를 하는 데 밑거름, 자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3. 재직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IRB 위원장을 8년 정도 했어요. 우리나라 초창기에 IRB가 들어올 때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 IRB를 맡아서 초창기에 운영을 했었는데, 일복이 작동을 했는지 FERCAP이라고 아시아권에서 IRB 인증을 하는 기구가 있는데, 그 기구로부터 ‘우리 백병원이 qualified된 IRB가 되어야겠다’ 해서 그 인증을 받는 대가를 올렸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그런 일들이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니고 팀이 잘 갖추어져서 합심해서 창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프로젝트를 거치고 나면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을 하는 맛이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여러 사람의 힘을 십시일반 나눠서 한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프로젝트를 완성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굉장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아쉬운 부분은 권역 심혈관질환센터 작업을 할 때 굉장히 합심하는 정도가 100%, 200%, 300% 정도 발휘된 것 같아요. 우리 캠퍼스의 한진 교수님, 의대 행정실 여러분들, 김해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일구었는데, 그때 물론 동아대한테 뺏기고 성사는 못 됐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굉장히 많은 배움이 있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고, 결과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나는 게 많긴 하지만, 역학회 회장을 맡고 예방의학회 이사장 70주년을 맞은 것 이런 것들이 굉장히 기억에 남는 큰 성과들이고. 학교에서 이런 일을 하며 일상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죠.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역학회장을 할 때 제 앞에 회장님부터 나이가 많은 원로회장님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힐링을 제공했습니다. 1회를 선배님이 서울 신라호텔에서 진행했어요. 2회를 제가 진행했는데, 오기가 발동했다 할까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을 잡아두고 진행을 하는데, 거의 뭐 스파이 이송 작전에 가까울 정도로, 인력들을 배치해서 서울에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시고 그러니깐 부산역에 내리면 한 분 한 분 personal pickup 해서 해운대 숙소로 모시고 오고 제가 잘 배정해드리고 이렇게 좋은 시간 가졌습니다. 지금도 원로 선생님 만나면 한 번씩 그 얘기를 하세요. 그때 참 좋았다고. 그때 처음으로 문탠로드 워킹도 시켜드리고 그런 기억들이 학회와 관련된 일이지만, 정년을 맞이하며 파노라마를 펼치니깐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로 자리를 잡고 있네요.
4. 재직 중 안타까웠던 일이나 후회로 남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정말 꼭 될 줄 알았거든요. 서면심사에서는 2등하고 후발기관하고는 점수가 상대가 안될 정도로 점수 차가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깐 우리가 낙점이 되지 않았어요. 권역 심혈관센터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대한민국의 의료기관이 국가 또는 유력한 단체로부터 일정한 규모 이상의 수혈을 계속해서 받는 경우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생산해서 메워야 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그것은 굉장한 갭이 있고요. 제 경험이 그렇습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 되면 그 수혈을 받은 그룹은 그냥 넘어가는 느낌인데 저희들은 여하간 노력을 해도 따라잡기 힘든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그 센터에 우리가 부은 만큼의 노력에 견주어서 성과를 가지지 못했던 게 굉장히 회한으로 남고 더 각오를 다지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었고요.
그리고 두 번째 부분 제 개인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맴돌면서 아쉬운 부분이 우리 이사장님 영결식 부분이에요. 우리 이사장님이 토요일 아침에 소위 말하는 VIP 일정 체크하시는 분이 제 옆에 계셨는데, 우리 구성원들이 알기 전에 제가 알았을 거예요. 토요일 아침에 백낙환 이사장님 부고 소식이 떴어요. 그랬는데 잘 아시겠지만 저희들 마음에는 우리 이사장님은 이 기관 전체의 설립자시잖아요. 그리고 또 저를 포함해서 우리 학생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렇게 오늘이 있게 해준 굉장히 중요하고도 감사한 분인데, 연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마지막 부분이 아주 성에 차게 좀 멋지게, 아주 화려하지는 않아도 좀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한 부분이 괜히 한 사람으로서 죄스럽더라고요. 이렇게 자그맣게 만들어진 원내 영결식에 가서 인사드렸습니다만, 그 부분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제 뭐 어찌 보면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 되죠. 이제 대학에 몸담은 모든 우리 저와 똑같은 입장이 된 분들이 이제 ‘쟤는 내가 키웠어’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로망인데 물론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방의학이라는 학과를 겨냥해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막상 몸을 담고 쭉 해보니깐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가치도 있고, 또 할 만하고 즐기면서 평생을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뭐 이런 얘기를 한 번씩 해요. 수업을 통해서도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해도 시절의 변화인지 세태의 변화인지 이제 지금 막 갓 피어오르는 우리 학생들은 (예방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할 때는. 물론 외(바깥) 어떤 분들도 모셔가지고 또 트레이닝시키고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뭐 저희들이 몸담고 있는 곳은 의과대학이고 의과대학을 나온 우리 후배님이 이 과를 선택해서 좀 투신을 하면 정말 있는 것 없는 것 박박 긁어서라도 전수를 해서 또 멋진 예방맨으로서 역학맨으로서 성장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내내 있었는데, 일단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만, 공식적으로 종료를 맞이하는 시점까지 정말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가 번듯하게 없다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아쉽습니다. 학교를 33년 6개월이라고 했는데, 그렇게나 오래 학교에 몸담고 생활했던 것에 반해서 멋진 뭔가를 남기지 못한 부분이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워요.
5. 정년퇴직 후 갖고 계신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늘 몸에 담고 있는 계획입니다만, 이런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드리면 어떤 관점에서는 ‘정말 노탐 아니야?’ ‘자기 혼자 다 해먹을려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저는 정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저와 인제대가 말 그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밀알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하고프다’ 이런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33년이라는 숫자를 가진 광활한 대지니깐요. ‘후진을 못 만들었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하고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쭉 해오던 대로, 지금의 저에게 축적된 노하우라면 노하우, 코인이라면 코인, 이것을 풀어서 필요한 사람한테 쭉 나누어주면서 ‘인제가 발전하는 데 아주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지난 주말에 「복면가왕」의 가왕이 바뀌었는데 그분이 마스크를 벗으니깐 쟈니 리란 가수더라고요. 저는 쟈니 리를 사실 잘 몰라요. 근데 노출해서 알려지고 마지막 마무리하면서 잠깐 인터뷰했는데, 84세래요. 겉모습은 누가 봐도 늙은 노인이죠. 하지만 정신은 정말 아주 맑으신 것 같고, 또 포부는 본인은 죽을 때까지 노래 부르다 죽겠대요. 그러니깐 겉모습의 추함과는 전혀 다르게 거기 계신 분들이랑 시청자 모두도 탄성이 ‘멋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의미보다는 저렇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가진다는 게 정말 ‘자기관리도 특출해야 되겠고 또 자기성찰을 위해서 노력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배워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저는 진짜로 물론 제 자신 발전은 계속하고 싶습니다. 또 저의 발전이 곧 인제의 발전이기를 원하면서 특히 또 나중에 잠깐 말씀드리겠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한 공공 부분을 조금 더 같이 가지고 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6. 교육자로서 후배 교수나 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같이 나누고 싶어요. 하나가 소명의식입니다. 흔히 우리 교훈이 말해주듯이 저는 그 이야기가 참 좋더라고요. ‘인덕제세’ 그리고 ‘민족의 대학’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리고 글로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저는 우리 구성원들이 그런 글귀로만 쓰여있는 것에 대해 조금은 공감하고, ‘내가 그 뜻을 구현하는데 일익을 좀 담당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아니었는데 최근에 학생들을 수업 통해서 경험하면서 마음속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대놓고 이야기는 못 합니다. 피드백이 무서워서(웃음). ‘너희 대학은 이태석 신부를 배출한 대학이잖아’ 이런 이야기를 해요. 스스로 마음속으로. 그런데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많아서 ‘선생이 잘못해서 그렇구나’, ‘선생이 잘해야 한다.’ 우리 임상에 계신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 의과대학에 계신 교수님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인덕제세를 추구하는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고 민족의 대학의 일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행동하고 사고하고 하는 것들을 키웠으면 좋겠다 바래요. 요즘 너무 위축된 느낌이 없지 않아서 그런 걸 타파하면서 ‘조금 더 가슴을 크게 펴고 포부를 가졌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또 하나는 주인의식인데, 제가 출퇴근하면서 라디오를 즐겨 듣는데, 저는 굉장히 일찍 출근하거든요. 이른 시간에 원불교 방송을 한 번씩 들어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거기에 대선종사라는 원불교의 아주 큰 스님인 것 같아요. 대선종사 스님의 어록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 어록 중 하나가 ‘공부가 주인 공부가 있고 머슴 공부가 있다. 공부도 똑같은 공부라도 주인 공부를 하면 주인이 되고, 머슴 공부를 하면 머슴이 된다.’ 정말 와닿더라고요. 잘 아시겠지만 똑같은 식재료로 똑같은 요리를 해도 심쿵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셰프가 있는 반면에 그 좋은 재료 다 망가뜨리고 맛대가리 없고 입도 잘 안 대는 요리를 만드는 셰프도 있잖아요. 우리 주어진 것 열악하죠. 결코 열악하지 않다고 말 못 합니다. 열악하지만 주인의식을 가지고 똑같은 식재료를 ‘이왕이면 좀 더 맛깔나게 만들겠다’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 ‘우리도 또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소명의식, 주인의식을 가지고 좀 더 스스로 나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저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듣거든요. 교수들이 ‘뭐 생길 것도 없는데 뭐 그리 열심히 하냐’고, 그런데 맨얼굴로 보이지만 답을 하죠.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이 그래도 ‘남들로부터 있을 만한 곳이다 평가를 받아야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면 참 좋겠다’ 이런 바람을 가져봅니다.
7. 인제의대 / 백병원에 교수로 오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우리 때는 참,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데 인생이란 그렇더라고요. 아닌 말로 군대 갔다 와서 하면 되잖아요. 근데 그때는 군대 가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군 중견의라는 제도를 택했어요. 제가 조선대학교 박사 나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9월 달에 의학과 박사 과정을 받아주는 곳이 경희대, 조선대밖에 없었어요. 근데 경희대 등록금은 좀 비쌌어요. 조선대가 조금 더 쌌다고요. 그래서 광주로 뛰어가서 일단 적을 걸고, 적을 걸어야 군대 연기가 되니깐요. 적을 걸고, 박사 과정에 입문하고, 이 대학에 오게 된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부산대는 국립대학이다 보니 TO 이런 부분이 잘 해결이 안 됐고, 여기는 마침 선배 교수님이 ‘여기 와서 해라’ 이렇게 불러주셔서 그렇게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정말 제대로 트레이닝을 못 받았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배울 때는 밥그릇 문제 때문에 거의 산업의학이라는 필드에서 뛰었단 말이에요. 막상 오니깐 예방의학이라는 모습으로 밑에 레지던트, 전공의라고 올망졸망한 애들 훈련, 교육시키라고. 신임교수 받았으니깐 당연히 부려먹어야죠?(웃음) 딱 오더하는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초 1~2년간은 정말 죽을 둥 살 둥 힘들었습니다.(웃음)
어쩔 수 없이 분야는 아까 말한 대로 대한민국에서 예방의학이라고 표방을 하면 커버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역학, 보건의료, 관리 하면서 포함되는 그런 부분들이 되겠고 환경의학 등이 있는데요. 약간 더더구나 전체적으로 볼륨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굉장히 ‘좀 요원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소싯적에는 그 분야는 ‘지방에서 하면 거의 밥 굶는다’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대, 연세대와 주축으로 거의 거기 계신 분들만 맥을 이어가면서 선택을 하고 했지, 그 외의 대학에서는 선택하기가 굉장히 힘든 구조였어요. 그래서 쉽게 얘기하면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서 다 헤엄을 쳐야 하는데, 뭐 지나고 나면 알 수 있지만 제가 한 번씩 장에서 ‘레드오션보다는 블루오션이 좋다’ 이런 얘기를 잘하는데, 어찌 보면 본인이 거기에 affinity가 있고 하면 그런 선택을 해도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때의 그 금방 이렇게 커나가야할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선택이 굉장히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자꾸 상대적으로 위축이 되고 해서 그런 이 만들어놓은 소위 말해서 pool이 너무 없으니깐 여기까지 해당이 거의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유수한 사회의학 하는 친구가 여기 왜 오겠어요. 서울에 가지. 이런 식이 되는 거죠. 말하자면. 그래서 참 고민인데 저희도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면 사실은 좀 두루두루 갖추는 게 중요한데, 그런 부분은 취약하다고 자인할 수 밖에 없고, 향후에 이제 기회가 닿으면. 김택중 교수님 같은 분은 양다리 걸치고 있잖아요. 말하자면 윈윈 해야죠. 그리고 우리 영역에서는 사회의학을 definitely하게 사회의학이라고 말을 하면 PhD 선생님들이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마킹이 되어 있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특히 고령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저는 커뮤니케이션, 행동, 행태학, behavior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한 번씩 물어봐요. ‘말동무해 주고, 두 시간 말동무해 줬으니깐 페이 5만 원 내라고 하면 돈 낼 노인이 있겠니. 언제쯤 지나면 있겠니’라고 물어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10년이면 안 되겠나’, 어떤 사람은 ‘20년 안 걸리겠나’ 이렇게 말을 해요. 근데 우리나라가 워낙 공짜 공짜하는 득세하는 장을 만들어놔서 좀 힘들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서비스도 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깐 그런 서비스를 대비해서 방금 말씀하시는 게 큰 영역에서의 사회의학이라고 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건강행태학, 커뮤니케이션, 사회의학, 네트워크, 소통 이런 것들이 점점 더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투신들을 해서 같이 가면 좋겠다 생각을 합니다.
8. 의과대학 초대 학장님이셨던 전종휘 학장님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종휘 학장님이라면 우리 인제맨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위대한 분이시고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시고, 저는 전종휘 학장님이나 최하진 학장님을 생각하면 항상 어떤 모습이 생각이 나는가 하면, 연세가 80이 넘으셨을 때도 컨퍼런스라든가 심지어 학생들이 발표를 하더라도 항상 제일 앞자리에 앉아 계셨어요. 그래서 경청하고 풀타임으로. 그 다음에 또 new, current한 지식은 꼭 질문하시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몸소 보여주시는 이런 어른의 모습. 뭐 특별히 가감이 없어요. 그냥 이렇게 와서 빠른 행동이 될 수가 없잖아요. 노인 분이시니깐. 거동이 어정쩡하게 오셨지만은 자리 지키시고, 질문하고, 어떨 때는 또 화사하게 웃음 보여주시고. 그런 모습이 저는 아직도 기억에 남고요. 그런데 그 이후에 그런 어르신이 잘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전종휘 학장님 영결식에 저 갔었습니다. 혼자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그런데 가슴이 너무 아팠던 게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영결식을 했는데, 제가 아침 첫차를 타고 부리나케 올라갔거든요. 사실은. 근데 저 도착했을 때 식이 다 끝나고, 버스에 관을 옮겨 싣고 출발하는 그런 타이밍에 도착을 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게 아직도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했고요, 그런 분이 말씀으로 한 게 아니라 몸으로 우리 후학들한테 굉장히 큰 가르침을 주신 거 같아요.
9. 재직 중 미처 이루지 못하여 아쉬운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거의 뭐 여러 가지 물론 있겠습니다만, 1번이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내 새끼 못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내가 나중에 내 관을 들게 할 수 있는 내 새끼, 정말 로망 아니겠습니까. 교수님이라면. 어디가도 ‘내가 키웠어’ 할 수 있는. 제가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여러 가지 세태와 이런 환경 상황 때문에 임무가 잘 안된. 잘 아시겠지만은 저희들 출발이, 우리 교실 출발이 직업환경의학의 섹터와 우리가 같이 출발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97년에 전문의가 새로 생기면서 디바이드가 되었거든요. 그러니깐 구성원의 majority는 직업환경의학과 쪽의 배치가 많고, 그러니깐 더더욱 아마 좀 이렇게 초이스가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엄상화 교수가 우리 교실의 엄상화 교수가 벌써 50대 중반이지 않습니까. 내일 모레 60입니다(웃음). 그 밑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 좀 심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계속 남고 있고, 또 제게 남아있는 어떤 기간 동안에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보란 듯이 잘 키워서 반짝반짝하는 인재를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만들고 무대를 내려오고 싶습니다.
10. 무엇이든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자꾸 남 이야기를 빌려서 대선종사님 이야기 이런 걸 한 번씩 합니다만 ‘일은 누구나 하는데 가치는 내가 부여하는 것이다’를 정말 전달하고 싶거든요. 아까 식재료로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일은 누구나 하잖아요. 그래서 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가치 부여를 하는, 그것은 일종의 기획을 해야 하고, 남들과 똑같이 해서 가치를 부여받기는 좀 힘들 것 같아요. 뭔가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기획을 하고 스피릿을 불어넣고, 이런 행위들을 우리 구성원들이 조금 더 제가 아까 말씀드린 민족의 대학, 글로벌, 이런 소명과 함께 조금 더 발휘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이런 말씀을 꼭 드리고 싶고요. 그다음에 이런 흔히 말하는 초심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MAY I HELP YOU’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보건의료인이라면, client가 저희들 입장에서는 학생일 수도 있고, 대학원생일 수도 있고, 임상 선생님들은 환자일 수도 있어요. 또 제가 일하는 field에서는 그 지역의 어르신일 수도 있어요. 근데 이게 상황상황마다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병원에서는 어찌 보면 환자가 을이고 저희들이 갑일 수 있습니다. 근데 field 나가면 무조건 우리가 을이고 대상자가 갑이에요. 그래서 제가 연구 나가면 선생님들, 간호사들, 같이 일하는 사람들께 항상 그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한단 말이에요. 절대 ‘내가 낸데’ 하면 절대 일 못 한다. 무조건 ‘MAY I HELP YOU’ 마음을 가지고 client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배려고 친절이냐’ 이걸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꼭 의과대학 학생이라서 안 해도 되고, 임상 교수님이라서 안 해도 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똑같은 일을 해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면 성과도 좋고, 가성비도 좋고, 효율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 부분도 조금 헤아려 가면서 일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촬영일 2021년 10월 25일
사회 김택중 교수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촬영 및 편집 김현태 (의학교육정보지원실)
디자인 김주영 (의학교육정보지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