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access_time 2017.04.20 13:32visibility 66
"어꾼 짜르은!" 그 곳 사람들의 눈빛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며, 가장 많이 주고 받은 말이기도 하다. 크메르어로 '어꾼'은 '감사합니다'라는 뜻이고 '짜르은'을 붙이면 '무척 감사합니다'하고 의미가 강조된다. 굳이 뜻을 떠올리지 않아도 손마디가 까맣게 주름진 두 손을 곱게 모아 연신 같은 말씀을 되뇌는 할머니 환자분과 눈을 맞추었을 때, 그 뜻은 마음 깊이 전해졌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 중에 이보다 더 따뜻하게 가슴을 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6박 8일간 머물렀던 캄보디아는 작열하던 태양과 함께 적도 부근의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는 깊고 푸른 하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환자의 대부분이 더위로 인한 두통을 가지고 있었고, 봉사단원들은 물병을 몇 개씩 비우면서도 옷깃을 적시는 땀 때문에 화장실을 찾지 않았을 정도로 잔인한 더위를 뽐내던 캄보디아. 하지만 그 곳 사람들의 순수한 성정과 닮아있던 그 밝고 맑은 하늘은 그리운 장면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요란하게 이륙하는 비행기 안, 해외 의료봉사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막연한 설렘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곳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환승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대기 중일 때, 의과대학 시절부터 이태석 신부님의 친구이셨던 양종필 선생님께서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태석 신부님의 생전 영상을 노트북으로 보여주셨다. 비슷한 영상을 학교에서 영화로, 다큐멘터리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선배님의 모습을 기리며 떠나는 의료봉사이기에 모두가 진지한 태도로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에 집중하였다. 덕분에 캄보디아 프놈펜 시로 향하는 남은 비행 중에는 들뜬 마음을 조금 차분히 가라앉히고 의료봉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다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이태석 국제의료 봉사단은 첫 진료 장소로 미래로 학교에 자리를 잡고, 크게는 접수,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진단검사의학과, 약국으로 일을 분담하였다. 모든 과는 골고루 바쁜 진료 업무을 뽐내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대기 의자가 필요했고, 결국에는 접수 속도를 조절해야 할 정도였다. 접수에서 환자의 주 증상을 듣고 방문할 과들을 정했지만, 선생님들께서는 맡은 과 진료를 보신 후 진료소가 붐비는 중에도 추가로 필요한 과로 보내서 환자들의 소중한 기회를 늘려주셨다. 학생들은 과 별로 통역 학생들과 함께 선생님들의 진료를 돕거나 접수, 안내를 맡았다. 숨쉬기가 가끔 답답해질 만큼 더운 날씨에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 한 대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대기 환자가 안쪽까지 찬 진료실은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힘든 내색 없이 환자들과 눈을 맞추고 통역 학생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맨 손으로 환자들의 몸을 정성스레 진료하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환자와 더불어 나까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안내를 맡은 친구들은 캄보디아 통역 친구들에게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아이 먼저 진료 받고, 어머니 진료를 안내해 드릴게요."등의 캄보디아 말을 배워서 환자들을 안내하였고, 혈압 재는 일을 맡으면 행여나 내가 실수하여 환자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할까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맡은 일이 무엇이더라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서로의 모습이 대견스럽고 멋지게 느껴졌다. 분명 익히기 어려웠을 의료 용어를 한국어로 공부해와서 '피임' 같은 어려운 단어도 포기하지 않고 통역해내던 캄보디아 통역 학생들도 감동을 주었다. 매일 이렇게 서로를 돕고 배워가며, 의료 현장에서 사소한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특히 기억나는 일을 꼽자면, 두 번째 진료장소였던 쩡아엑 지역 보건지소에서 약국의 실내 대기석이 계속 부족해서 새로 의자를 가져다 놓다가 소아과 대기석과 혼란이 생겨 곤란했을 때였다. 진료에 바쁘신 선생님들께 방해가 될까 여쭐 새도 없이 스스로 빠르게 판단하여 약국의 대기석을 몽땅 약국 창문 쪽 바깥으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약국에서는 복약지도도 그 쪽으로 옮겨 하였고, 업무의 진행이 훨씬 수월해졌다. 어찌 보면 작은 결정이었고 의자를 나르는 단순한 노동이었지만 진료를 원활히 하는데에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덕분에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볼 수 있었다면,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의사가 자신의 진료 뿐만 아니라 의료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분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해외봉사가 화제가 될 때 드물지 않게 "우리나라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꼭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가?"라는 말이 나오곤 한다. 해외 의료봉사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 역시 그 질문에 스스로도 답할 수 없었다. 국내 노인요양원, 어린이병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 경제적 여건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요한 약 한 가지라도 더 처방해주려 노력하시던 선생님들, 그런 선생님의 눈빛과 음성만으로 치료를 다 받은 듯 두 손을 모아 "어꾼 짜르은"하며 계속 고개를 조아리시던 환자 분들과 현장에서 함께 하며, 이 질문에 대해 현실적이고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고통스럽거나 위중한 병을 가지고 있어도. 혹시나 어렵게 경제적 여건을 마련한다 해도, 그 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기회조차 흔하지 않다고 했다.
또한 장기적으로 긴밀한 관리를 받아야하는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계속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설명드린다 하여도 이는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나라에도 안타까운 분들이 많지만 상대적인 수준의 격차란 얼마나 큰 것인지 직접 와서 보고 듣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아직 어설픈 의학도인 나의 마음마저 무겁고 답답해졌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버리고 수단이라는 나라에 아예 자리잡아 그 곳 사람들을 돌보셨던 이태석 신부님의 큰 뜻에 감히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속가능한 도움의 중요성을 먼저 경험하셨기에 이번 일정동안 조산사 교육을 위해 통역 학생과 미리 연습하여 강의를 하시고, 진료 장소였던 쩡아엑 지역 보건지소가 작년에 비해 잘 보수되었다고 기뻐하시던 선생님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이렇게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 "해외 의료봉사를 직접 다녀와보니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히 필요한 곳이라면 내가 도우려 손을 뻗는 사람의 피부색이며 쓰는 언어가 그리 중요할까? 오히려 낮고 절실한 곳이기에 우리의 도움은 나비의 날개짓이 불러오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처럼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나라 역시 앞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발전하는 의료의 혜택을 지금만큼 누리고 있다. 그렇기에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히 우리 중 누군가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양쪽 좌석을 붙잡고 서서 각자의 생각을 발표했던 피드백 시간은 단원들의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설레고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의 발표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시고 다음 의료봉사를 위해 솔직한 피드백을 원하시던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책상이 더 어울리는 학생으로서가 아닌 지금의 그리고 먼 훗날의 동료로서 대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특히 피드백 중에 민명희 선생님께서 "측은지심이 바로 의료의 시작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정신이 번뜩 들만큼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번 봉사활동으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점을 뭐라고 말로 표현해야할지 몰랐는데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의료봉사 중에 느꼈던 '측은지심'은 내가 의학지식이 더 많은 사람이거나 조금 더 먼저 발전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다.
눈 앞에 찾아온 환자의 어려움과 고통을 안타깝게 느끼고 공감하는 마음이 바로 이 곳 캄보디아가 가르쳐 준 의사의 측은지심이었다. 이런 마음은 내가 진료하는 환자가 누구이던지 진심을 다하는 '의료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학교 강의에서 교수님들께서 흔히 언급하시는 의사와 환자의 '라뽀(rapport)' 역시 측은지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민 선생님의 말씀을 의학도로서 혹은 훗날 의사가 되었을 때에도 오래오래 마음에 새기려고 한다.
한 여름 날의 캄보디아에서, 깨고 싶지 않은 '꿈'과 같았던 6박 8일간의 일정. 힘든 것도 잊고 몰입하여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달콤한 '꿈'이었고, 마음 속 도화지에 그려둔 훗날 나의 모습들 중 한 장에 좀 더 또렷한 윤곽을 만들어준 진짜 '꿈'이기도 하다. 부산 시청에서 열린 발대식 때 의료팀 대표로 선서를 하며 느낀 기대와 책임감을 다시 떠올리며, 모든 의료봉사 일정을 추억하고 반성해 본다. 교수님께서 한 번 들어보라고 건네주신 청진기로 처음 들어 본 그 곳 환자의 심장 소리를 생각하니, 내 가슴도 따라 뛴다. 감사하다며 수줍게 웃는 환자들의 커다란 눈망울도 기억 속 한 장면에 아련하게 떠오른다. 이 모든 것들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감사히 간직하여, 겸손하고 진지한 배움의 자세를 가진 의학도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캄보디아, 어꾼 짜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