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access_time 2017.05.15 17:40visibility 109
2013년 7월 14일 뜨거운 여름날, 부푼 기대와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해외 의료봉사를 위해 부산과 자매도시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향했다. 베트남 호치민 시티를 거쳐 이동 시간만 무려 8시간, 숙소까지 도착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역시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서 인내는 필수다. 준비해 온 각종 수술기구와 약품, 물품박스를 풀어 정리하고 내일부터 있을 보건소 진료를 위해 각자 역할 분담을 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 15일부터 16일, 이틀 동안 언뚱마을 보건소(Kork Roka Health Center)에서 환자들을 진료했는데, 나는 첫날에는 약국, 둘째 날엔 환자 접수를 배정 받았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모였는지 이른 아침부터 보건소 앞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마을 주민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현지보건소로 들어서는 순간, 한국과는 많이 다른 캄보디아의 열악한 보건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료장비는 커녕, 테이블과 의자, 환자들이 누워 쉴 수 있는 침대가 전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몰려온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위해 약품을 꺼내 분류하기 시작했다.
병원진료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로 나뉘었는데 약품 역시 과별로 나눠 소화기, 호흡기, 해열, 진통제, 항생제를 질환 별로 나눴다. 환자접수는 환자들에게 손목 넘버링과 번호표를 주어 대기하게 하고 접수대에서 순서대로 접수 받았다. 혈압과 체온을 재고 이름과 나이, 주증상 (C.C:Cheif Complain)을 현지 통역 학생들을 통해 들어 차트에 적고 진료 받을 각 과로 안내했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진료 후 약을 처방해주시면 약국에서 약을 제조하고 환자에게 복약 설명을 했고 구충제를 바로 복용하게 하도록 했다.
이 접수부터 환자 안내, 진료, 약 제조 후 복약 설명까지의 과정이 정말 간단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꽤 어렵고 복잡했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시간이 오래 걸려 참 답답했다. 그리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환자에 좁은 보건소 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금세 시장 통처럼 되기가 일쑤였다. 특히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오다 보니 약국에 약을 기다리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 약이 밀리기 시작했고 환자들은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자 나는 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고 약 이름이 생소해 약을 빠르게 찾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그러나 지루할 법도 한데 캄보디아 사람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너무나 고마워하는 덕분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리고 나는 환자 접수 때 조금이나마 캄보디아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간단한 크메르어 인사말을 외웠는데 몇 번을 되뇌어 보아도 잘 외워지지가 않았다. 준립쑤어 (안녕하세요), 어꾼 (감사합니다), 리하이 (잘가요) 이 3개만이 내가 그들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3마디에도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 나는 봉사 내내 정말 행복했고 즐거웠다. '정말 이 사람들은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구나.'라고 느꼈다.
캄보디아는 더운 날씨에 맵고 자극적은 음식을 자주 먹는 나라라 그런지 사람들은 소화기질환과 피부질환 환자가 많아 보였고, 아이들은 주로 호흡기 질환인 감기가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환자 중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환자가 있는데, 내과 환자로 담석과 담낭염이 많이 진행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로 잘못하면 복막염으로까지 번질 위험 있는 환자였다. 환자는 평상시에도 잦은 복통과 속쓰림을 앓았다고 하는데 이 상태까지 갔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치료를 받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이야기일까. 교수님께서는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까 꼭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당부하셨고 안그러면 복막염 때문에 죽을 수 까지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에 환자와 환자 아내의 얼굴빛은 어두워졌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아프고 슬펐다.
17일에는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 병원 수술실을 참관했는데 이 병원은 의사선생님과 선교사님들이 세운 병원이라고 했다. 원래는 구순구개열 수술을 주로 하기로 했는데 이 날에는 환자가 없어 간단한 몇 가지 성형수술을 시행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캄보디아의 참혹하고 아픈 역사의 흔적인 킬링필드에 갔다. 무려 전 국민의 1/4인 2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선생님, 의사, 외국인,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참히 살해되었던 학살의 현장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끝나고, 베트남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정치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라는 공산당에 의해 시작된 대학살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 이렇게 잔혹한 역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봉사 마지막 날, 18일날에는 킬링필드에 있는 보건소(Cheung Ek Health Post)에서 진료를 했다. 이 날에는 환자 진료실 안내와 보조를 맡았다. 환자를 진료 받을 과로 인도해 환자가 대기할 수 있도록 하고 환자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무엇하나 허튼 일이 하나 없듯이 이 또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100여명의 환자가 몰려왔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환자가 다른 잘못된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역시 봉사는 나 하나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날 봉사를 다 마친 뒤, 폭우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정말 신기했다. 모든 진료가 다 끝나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떠난 후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주는 시원한 선물인 것만 같았다.
이번 짧은 의료봉사를 통해 값진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의료혜택이 부족한 캄보디아에 비해 너무 풍족한 한국에서 사는 것,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것들에 한번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했다.
두 번째로는 베푸는 마음이다. 아직까지도 캄보디아는 혼자 자립적으로 성장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보였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봉사를 통해 남을 돕고 섬김의 자세를 고루 갖춘 참된 간호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따뜻하고 순수한 캄보디아 사람들을 통해서 봉사와 나눔을 내 나름대로 새롭게 정의 내렸다. "같이 소통하고 함께 웃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내가 느낀 것은 간호사로서의 꿈과 비전이다. 봉사를 하면서 이러한 봉사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봉사여야겠다고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소통 능력과 글로벌 마인드를 지닌 전문 의료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해외 의료자원봉사는 내게 또 다른 큰 도전과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런 내 꿈과 목표를 꼭 이루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외 의료봉사를 위해 준비하고 인솔해주시느라 애써주신 부산국제교류재단과 인제대학교 및 백병원 관계자분과 그 외 모든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저에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