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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료봉사 후기 캄보이다를 다녀와서...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 2017.05.15 17:35 36

내가 캄보디아에 처음 갔었던 것은 7년 전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톤레샵 호수에 있는 수상 가옥 빈민촌이었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활 실상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권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열악한 위생의 생활환경, 한 눈에 보아도 건강하지 못해 보이는 그들의 외관, '빈곤'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지친 표정을 보았다. 그때는 여행을 하던 중이라,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부터 생긴 의료봉사에 대한 열망과 막연한 동경은, 이번 여름방학에 학교의 도움으로 인해 실현될 수 있었다.

의료봉사를 시작하기 전날 밤에, 봉사단장님께서 해준 말씀이 기억이 남는다. 봉사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라고. 그 말씀을 들으니 책에서 본 내용 또한 어렴풋이 떠올랐다. '봉사'라는 것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봉사라고. 봉사를 하면서 어떠한 깨달음이 봉사의 의미를 '함께'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캄보디아에 있던 7일 중, 의료봉사는 총 4일간 하게 되었다. 내가 4일 중 처음 2일에 배정된 곳은 헤브론 병원 수술실 봉사였다.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 병원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 병원이며, 현지인들에게는 한국인 병원이라고 불리며 신뢰도 또한 높은 병원이다. 헤브론 병원에 처음 도착했을때, 생각 외로 바글바글한 환자들의 모습에 놀랐다. 병원 외부에 간이 의자들을 놓고 선교를 하는 모습들과, 병원 로비에서 햇볕을 피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서 낯잠을 청하는 모습들이나, 내가 생각하는 질서정연한 병원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백병원의 수술팀 의사분들과 간호사분들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수술 약품들을 병원 내부로 옮겨서 정리하고,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수술실에서 생전 처음 입어보는 초록색 수술복이 낯설었지만 앞으로 내가 무슨 봉사를 할 수 있을지 설레기도 했다. 한국 의료진 외에도, 수술실에서 한국어를 크메르어로 통역해줄 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과 학생인 짠나도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

헤브론 병원에서 수술하게 된 환자는 주로 외과 환자가 많았다. 내가 수술팀에서 봉사하는 이틀동안 수술환자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지증을 앓고 있어서 엄지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 자궁 탈출증이 있어서 자궁 적출을 해야 하는 중년의 여성, 발의 일부를 절단하여 치료중이지만 캄보디아의 높은 기온으로 인해 감염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죽은 조직들을 제거해야 하는 젊은 남성, 손에 감전이 되어 피부이식술을 해야 하는데, 상처의 감염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피부를 뗀 자리의 감염 또한 걱정하며 수술해야하는 중년의 남성, 캄보디아 봉사팀 중 진료팀이 봉사하고 있는 보건소에서 발견하여 우리 병원으로 보내온 맹장염 환자, 등에 큰 종기가 나서 생활하기가 불편하다는 할머니, 입 안에 덩어리가 자라서 제거해야 하는 할아버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의료진들께서 치료해주고, 돌봐주셨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첫 번째로 수술한 다지증 어린이였다. 수술실로 들어온 이 아이는, 난생 처음본 외국인인 우리를 보고 잔뜩 겁먹은 눈치였다. 아이가 아주 어린데다가 자신을 수술할 사람들이 외국인들이라는 것을 보면 놀랄 것은 당연했다. 수술실에 아이가 눕고 마취를 하자 아이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집도의께서 아이에게 한국어로 "괜찮다, 조금만 참아, 울지마 꼬마야" 등등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많은 말을 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약간 불안해 보였다. 이럴 때 통역 학생 짠나가 톡톡히 역할을 해 주었다. 짠나 학생이 이들에게 친숙한 크메르어로 이 아이를 다독거리며, 웃으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몇 마디 말을 하니 아이는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짠나가 있었기에 환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수술할 수 있었고, 캄보디아인 환자와 한국인인 우리 사이에 감정의 통로를 놓아준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빡빡한 병원 수술 일정에도, 짠나는 힘들다는 투정 한번 부린 적 없이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수술과 피가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수술방에 항상 서있으면서 행여나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따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던 친구였다. 우리 의료진이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보내드렸던 환자마다 우리에게 손을 모으고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웃으며 수술실을 나가는 그들의 얼굴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지만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봉사는 단순히 남을 돕는 것 뿐만 아니라 날 기쁨에 웃음 짓게 하는, 마음에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캄보디아 봉사의 나머지 이틀은 프놈펜 외곽 지역에 있는, 킬링필드 옆의 층액 보건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킬링필드의 잔혹하고도 아픈 동족상잔의 역사 옆에서 살아온 그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보건소나, 병원으로 갈 수 있는 주민들은 그나마 생활수준이 괜찮은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의 오지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우리의 의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층액 보건소는 정말, 황야에 돌로 된 황량한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의료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쓰이지 않는 보건소이다. 외과,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의 4개 과가 진료함에도 선풍기는 단 2대 뿐이었다. 첫날에는 자궁암 검사 봉사를 하였다. 자궁경부암 screening 검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불편한 검사인 만큼 검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여성들도 있었다. 불편한 검사인 만큼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최대한 이완된 자세에서 검사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나와 함께 한 통역 학생의 이름은 낌리응이었다. 낌리응은 탁월한 한국어 실력으로 산과 문진을 해주었고, 환자들이 긴장하지 않게 해주었다. 의학 전공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의학용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산과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환자들에게 능숙하게 잘 전달하는 모습에 놀랐다. 물론 의학용어를 알아듣기 위해 공부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봉사 마지막 날은 보건소 소아과 진료보조와 초등학교 페이스 페인팅, 구충제 먹이기 봉사를 했다. 소아과 민명희 선생님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료하셨고, 크메르어를 익히셔서 진료에서 활용하시기까지 하는 열의를 보였다. 바쁜 진료를 하시면서도 후배 의사인 나에게 진료는 어떻게 하는 거다. 소아는 체온을 유의깊게 봐야 한다. 등 선배 의사로써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의사의 노력이 있고, 통역 학생의 노력이 더해져 환자와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의료봉사를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참된 봉사의 의미임을 느꼈다. 점심을 먹고 층액 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페이스페인팅과 구충제 먹이는 일을 했다. 미술 전문이 아니어 서툴렀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싶어 하는 캄보디아 아이들에겐 충분했다. 같이 페이스페인팅을 했던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애들 마음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 한국에서는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도 맘에 안들면 울고 떼쓰고 다시 해달라고 난리일 때도 많은데. 여기 애들은 그림 그려주면 그저 고맙다고 환하게 웃어주니.." 아이들의 맑은 웃음을 보니, 반나절 땡볕에서 그림을 그리고, 구충제를 갈아 먹였어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아픈 건, 신발이 없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중에 캄보디아를 가게 될 사람들이 있어,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헌 옷가지와 신발을 꼭 챙겨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봉사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몇 가지의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되었다.
헤브론 병원은 수술실이 있지만 수술할 수 있는 의사와 마취과 의사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다른 나라의 의사들이 헤브론 병원으로 오지 않는 이상 거의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술할 수 있는 외과 의사가 된다면 헤브론 병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한 번보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그들의 질병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는, 층액 보건소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 "다음에는 언제 오세요?" 나는 이 대답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봉사가 끝나고 모든 차트를 정리하면서 이 나라는 후진국임에도 고혈압이 상당히 많고,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관절염, 디스크 등 만성 질환이 많다. 일회성 봉사라면 환자들이 현재 호소하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밖에 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열이 있는 환자에게는 해열제를, 배가 아프면 진통제를, 어깨 등 근육 통증이 심한 환자에게는 리도카인을 국소 주입하는 등의 치료이다. 하지만 해외 봉사를 정기적으로 할 수 있고, 환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기초적인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을 시행할 수 있다면 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과도한 물질적, 금전적 원조는 자칫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여 국가 발전에 오히려 저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의료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선진국의 발달된 의료 혜택을 나누어 주는 것은 국가에게 이익이 되지,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진국으로의 정기적인 의료 원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봉사를 마치고 낌리응이라는 통역 친구가 우리와 헤어지기 전에 한국어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 캄보디아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캄보디아도 더 발전해서 다른 어려운 나라들을 도울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젊은 나이인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미래에 나라를 이끌어갈 지식인인 대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니, 캄보디아의 미래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캄보디아 봉사를 위해 소중한 여름휴가를 내셔서 오신 여러 의사분들과 간호사분들도 정말 멋있었다. 어른이 되고 직업이 생기면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낯선 땅으로 봉사하러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휴가때 편히 쉬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 땀흘려 봉사한다는 것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봉사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인생의 선배들에게 배운 이런 숭고한 마음들을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이다. 내가 의사로 성장할 때까지 캄보디아에서 봉사했던 날들이 선물해준 소중한 감정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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